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(문단 편집) === 1983년 6월 30일: 생방송 개시 === 9시 뉴스와 정규 프로그램이 끝난 10시 15분, 부조정실의 큐 사인과 함께 생방송이 시작되었다. 초기 방송포맷은 사전에 신청 받은 이산가족 중 150여 명을 공개홀에 초청하고 유철종 박사와 이지연 아나운서 두 사람이 한 사람, 한 사람의 사연을 자세히 소개하는 형태였다. 또한 각 지역국을 연결하여 지방 소재 이산가족의 사연도 소개하고, 양측 방송국에 있는 사연을 대조하여 맞을 경우 전화통화 및 지역국간 이원중계를 해 보는 방식이었다. 또한 그전부터 이미 이산가족찾기 사업을 벌이고 있던 적십자사[* 30여 년 동안 적십자를 통해 3천여 가족이 만났다고 한다.]와 [[KBS 제1라디오]], 치안본부(현 [[대한민국 경찰청|경찰청]]) 전자계산소를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는데, 사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본래 목적은 이쪽에 가까웠다. >처음에 이런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이 잘 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. 과연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. 하지만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<스튜디오 830>의 확대 방식으로 120분짜리 프로그램이 나가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세상이 바뀌어버렸다. KBS 중앙홀에 설치된 접수대에는 상봉 신청이 쇄도했고 밤 11시쯤에는 벌써 중앙홀이 거의 꽉 찼다. 12시 15분에 끝내야 할 방송을 끝낼 수가 없어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는데, 일단 새벽 2시 30분까지 하고 이튿날 다시 하기로 했다. 이 첫날 4시간 동안에만 몰려든 신청자가 2천여 명에 달했다. >---- >당시 KBS 기획제작 1부장 안국정의 증언. 원 출처: <한국언론 100대 특종> - '이산가족 찾기 생방송: 석 달 동안 전국민을 울리고 감동시킨 특종 기획, 특종 드라마'. 나남출판. 2000. p232~233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20160110CNT00000550_M.jpg|width=100%]]}}} || 시청자 반응은 뜨거웠다. 메인 무대에 모신 150여 명 외에도 사전접수 단계에서 이미 800명 넘게 몰려들어 방청석까지 이산가족이 꽉 채워졌고, 이들도 소개하기 위해 손석기 아나운서를 비롯한 서브 진행자 3~4명이 투입되었다. 스튜디오에 설치해 놓은 10대의 확인 전화는 생방송을 진행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문자 그대로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.[* 당시 방송을 보면 각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소개하기 전에 전화기 10대의 전화번호를 먼저 소개해줬는데(7분 21초 경) 아직 사연들이 소개되기 전인데도 전화번호가 화면에 뜬 지 20초 만에 첫 전화가 울리는 걸 시작으로 하나둘씩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다. 중간중간 전화접수원들이 있는 자리를 비출 때마다 매우 바빠 보이는 모습이 눈에 띈다.] 심지어 방송에 고지된 10개의 회선 외에도 KBS 사무국(현 시청자본부 총무국), 나아가 781~784국으로 시작하는 KBS의 모든 전화회선이 온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. 서울과 지방대도시 전화국[* 현재의 KT가 한국전기통신공사이던 시절의 명칭.]에 [[시외전화|전자교환기(DDD)]]가 설치된 이래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. 방송을 보던 이산가족들은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까지 사전 출연약속 없이 무작정 [[여의도]] KBS 스튜디오로 몰려왔다. 유철종 MC가 '빨리 KBS로 달려와 주시기 바랍니다, '''[[야간통행금지|통행금지]]가 해제되었기 때문에''' 언제든 나오실 수 있어요'라는 멘트를 여러 차례 했던 것도 이런 반응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는데, 이산가족들은 그저 방송에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의지한 채 무작정 여의도로, KBS로 찾아왔던 것이다. 정보의 소통이 극히 부족하던 시절, 미디어의 위력은 이산가족들에게는 단비와도 같던 소식이었다. KBS는 원래 약 1시간 30분[* 생방송 진행 과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편성해서 최장 1시까지 연장할 계획은 있었다고 한다.] 정도로 계획되어 있던 생방송을 다음날 새벽 2시 29분경까지 긴급 연장해서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했고, 이어서 보도본부24시[* 현재의 [[KBS 뉴스라인]]과 [[KBS 마감뉴스]]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자정 종합뉴스]를 방영하며 이날 방송을 종료했다. 이 5시간 동안 한 자매의 첫 상봉을 시작으로 총 29가족이 서로 만났다. 심지어 방송을 마무리하며 총 스물여덟 가족..이라고 하는 찰나에 또 한 가족이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. 그러나 이날 방송은 사전 신청자의 극히 일부만 소개할 수 있을 뿐이었고, 유철종을 비롯한 진행자들은 "정말로 사과의 말씀을 올려야 할 것 같다. 방송국 측에서도 다음 주 중으로 꼭 여기 나오신 분들을 마저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겠다"는 멘트를 하며 방송을 마쳤고, 현장 화면은 그로부터 3분간 더 이산가족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비춰주었다. 이때 장면을 보면, 다음에 언제 또 방송이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[* KBS 본사 차원에서 연속생방송이 결정된 것은 다음날 낮이었다.] 미처 소개를 못한 출연자들과 이산가족들이 전부 방청석에서 무대로 내려와 기를 쓰고 플래카드를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고 있다. 이렇게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은 5일간 밤낮으로 이어졌다. 이 5일간의 릴레이 생방송 동안 '''시청률은 78%'''를 찍었고[* 1980년 [[언론통폐합]] 이후 (방송사가 두 개뿐이니까) '못해도 2등'이라는 나태한 의식이 팽배해 있던 80년대 KBS, 그것도 KBS1에서 이런 시청률을 기록한 건 정말 대단한 거다.] 500여 명의 상봉이 이루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